할렐루야!! 벌써 9월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 임하여 가정과 직장, 학교와 모든 만남을 평안하게 하시는 은혜의 하루를 보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오늘 묵상하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평안이 사라진 야곱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집에 평안의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이 요셉만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편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만 편애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이삭은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삭은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으로 인하여 자기 절제를 잘 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고기만 먹는 편식을 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이삭의 그런 모습조차도 예쁘기에 고쳐주지 않았을 것이고, 고기를 절제하지 못하는 식습관으로 인하여 결국 당뇨병에 걸려, 당뇨합병증으로 인하여 눈이 잘 안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창세기 27장 4절 말씀을 보면, 이삭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맛있는 고기 요리를 먹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토록 좋아하는 고기를 항상 제공해주는 에서가 얼마나 예뻐 보였을까요? 그것 뿐만 아니라, 이삭은 우물을 차지 할 때마다 주변의 부족들과 나라들이 우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시며 파는 곳곳마다 우물을 나오게 해주시지 않았다면, 이삭이 이끄는 부족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냥을 잘하는 에서, 즉 강하고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하는 에서와 야곱은 비교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부족 국가를 운영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에서가 집안을 이끌어야 맞기에 에서를 더욱 편애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편애를 눈 앞에서 늘 지켜보았던 야곱은 가슴에 한이 맺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은 요셉만 편애를 합니다. 왜 요셉만 편애하였을까요? 91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아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아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데, 요셉은 착하고, 정직하고, 순종적이며 어떤 아버지라도 좋아할 만한 아들이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의 잘못’에서 잘못의 원어적 의미는 악, 악행을 의미합니다. 즉,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행하는 악한 일을 의미합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요셉은 고자질을 잘하였기에 미움을 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악행에 동조하거나 참여하지 않고, 성품이 곧고 정직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알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아들과 악을 행하는 아들…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는 원문 상으로 ‘요셉은 지혜로운 아들’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다른 아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 지혜로운 아들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은 아버지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야곱이 형들이 양을 치고 있는 세겜으로 가서 형들의 안부를 살피라고 요셉에게 말합니다. 요셉은 분명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번째로 세겜은 야곱의 집으로부터 100km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채색옷을 입어가며 사랑받는 자녀로 17년을 누렸는데 100km나 떨어진 곳을 가라니 거절하기 충분하지 않습니까? 둘째로, 세겜 땅은 야곱의 딸 디나의 일로 인하여 세겜 사람들과 전쟁을 했기 때문에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적들이 있었기에 야곱도 요셉에게 형들의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형들은 세겜과의 전쟁에서 이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세겜 땅으로 용감하게 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거절할 만도 한데 요셉은 아버지 말을 그래도 따릅니다.
거기다 요셉은 성실했습니다. 세겜에 도착한 요셉은 이미 떠난 형들을 애타게 찾습니다. 요셉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형들의 행방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들에서 방황하는 요셉을 불쌍히 여기며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열심을 다해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이미 형들이 30km나 떨어진 도단으로 간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미 위험지역을 아무 문제없이 떠난 형들에 대하여 이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경과보고를 해도 되지만, 그는 맡은 바 일을 성실히 행하기 위하여, 더 멀리까지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끝까지 형들을 찾아 도단으로 갑니다.
이런 성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야곱은 어렸을 적부터 정직하고 성실하고 지혜롭고, 순종적이며, 태생부터가 다른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편애로 인하여 야곱의 가정에 평화가 깨졌습니다. 4절 말씀에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쉬운 성경으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요셉에게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때 쓰이는 인사말이 바로 ‘샬롬’입니다. ‘평안하라’는 뜻을 가진 샬롬을 도무지 요셉에게 건낼 수 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안이 깨진 가정을 만든 사람은 한 사람의 잘못만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아버지였던 야곱은 편애를 합니다. 그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잘못입니다.
형들도 잘못했습니다. 고의적인 악행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양을 치러 나가서, 양을 보지 않고 형들의 악행을 지켜보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는데, 첩자처럼 양이 아닌 형들의 악행을 지켜보게 한 것은 형들이 악행을 자주 행하였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러바친 요셉만이 문제가 아니라 고의적인 악행을 일삼는 형들도 분명 아버지에게 근심을 주는 잘못, 정직한 요셉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한 형들의 잘못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요셉이 아버지가 자신을 편애하는 것을 진정 몰랐을까요? 그당시 왕족 혹은 높은 귀족들만 입었던 채색 옷을 혼자 입고 다니며 형들의 미움을 받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지혜롭다면, 오히려 형들이 잘못을 이야기하듯, 아버지에게 옳은 말을 하여 함께 채색옷을 입던지, 함께 입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인사도 건내지 않는 형들에게 굳이 꿈을 이야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의 말이 형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알면서도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이야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가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한번 이야기할 때에 형들이 더욱 미워했다면, 다음 꿈은 마음에 담아 두던지, 아버지에게만 몰래 이야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요셉은 편애하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파하는 형들을 대놓고 놀렸습니다.
평안이 없는 가정, 평화가 깨진 공동체… 누가 더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 서기 위한 노력이 그 누구에게도 없었고, 서로에게 평화의 손길을 아무도 내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잘못만을 바라보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사과하기를 바라는 야곱의 가정은 도무지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시고, 교회가 평화롭고, 학교와 직장, 관계되는 모든 곳이 우리로 하여금 평안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평가하기 보다, 먼저 그 사람을 미워했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먼저 찾아가 사랑으로 안아주는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평안하게 하시고, 기쁘게 만들어 주시며, 하나되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 안에서 평안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